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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칼럼

이지눈에 바치는 찬사.

나이더스님 기고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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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스타리그의 팬으로 사는 것은 매우 고단한 일이다. 어느 스포츠나 팬들로부터 욕 먹지 않는 협회가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지만, 스타리그의 팬들이 견뎌내고 있는 정신적인 고역은 그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타 스포츠의 팬들이 진저리 치는 것이 방만한 운영이라면, 스타리그의 팬들은 자신들이 취미를 둔
이 바닥 자체의 존폐를 두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야구 협회가 아무리 파행적인 운영을 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프로 야구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컨데 Kespa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모두가 백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말한 조산아를 돌봐야
하는 입장이다. 지금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대기업들이 투자해 팀을 운영하고, 간간히나마 공중파 방송에서도 언급
되는 화려한 모습이지만 그 실체는 매우 허약한 빈골이다. 근본적으로 이 바닥을 옭죄고 있는 언제까지 이걸 끌고
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 상태이며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팬덤의 축소 등의 당면한 현안도
고민거리다. e스포츠의 성지라던 광안리의 신화는 지난 여름 프로리그 결승에서 처참한 미신의 종말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점점 드리워져 오는 "스망"의 그림자 속에서 협회의 임무가 막중함은 자명하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협회는 발족이래 단 한 번도 팬들로 하여금 믿음을 가질 수 있을만한 일을 보여준 적이 없다. 위에서 예로 든
거대 담론에 대한 대답은 고사하고 당연하고도 사소한 규정 문제에서도 여러 차례 그 허점을 드러냈을 정도.
스타리그의 팬들이 그 어떤 스포츠의 팬들보다 더 "오지랖 넓은" 종족이 된 것은 물론 스타리그의 위태로웠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것이지만, 그 이전에 협회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소치가 크다.

결국 이번의 FA 사태는 그동안 꾸준하게 차오르던 팬들의 인내심의 그릇에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이 되었다.
FA의 불편부당함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증명과 논의를 거쳤으니 더 부연하지 않겠다. 그리고 바른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할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귀를 막고 입을 다문 체 불통의 길을 걷고 있다. 그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이지눈 발족으로 이어졌고, 먼저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지눈이 내걸고 있는 FA 악법의 개선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지 없을 지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이번 FA사안 외에도 앞으로의 활동을 이어갈 이지눈에게 바라는 점을 미욱하게나마 몇 자 적어본다.


이지눈은 자기 논리에 고립된 엘리티즘에 빠져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팬들의 열망에 의해 개선/변경된 스타리그의
부분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팬덤 전체에 의한 합의와 지지가 모아졌을 때에만 간신히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지눈이 진장으로 상대해야 할 것은 협회나 구단, 방송사가 아니다. 그들을 향해 요구를 할 망정 이지눈이 제창하는
대의가 팬들에 의해 뒷받침이 되지 못한다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소리 없는 메아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적 타당성이 아니다. 근거가 타당함은 기본 조건이겠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을 폄하하며 논리를 위한 논리를 거듭하여 폭주하는 것은 경계해야할 일. 토론에서 당할 자가 없다던
한 논객이 자신의 과거 행적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던 것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프로리그의 구조에 대해 여러모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동안 벌어졌던 프로리그 비판론에서
위와 같은 아쉬움을 느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일부의 문제이겠지만 프로리그는 스타를 만들 수 없다는 시스템적인
비판을 선수 개인에게까지 확대시켜 프로리그의 강자를 깎아내리고 수동적인 지지층들을 필요 이상으로 비판했던 것은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왔다.

지금껏 우리가 "그들"을 향해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며 개선을 요구했을때 전가의 보도처럼 뽑아져 나온
반대 논리가 "라이트 시청자는 너희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논리의 그릇됨을 새삼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지눈의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눈여겨 볼 일이다. 중계권 파동 당시 우리가 보아온 행태를 감안하건데, 팬들의
뜻이 갈라지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하는 바이다.

우리가 글을 쓰고 리플을 달며 즐기는 스타 커뮤니티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은 정치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논리를 내놓고, 갑론을박을 거듭한다. 그 주장과 태도가 올바르다면 게시판의 여론을
자신에게로 모을 수 있고 이는 현실적인 변화를 이끄는 초석이 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유명한 이들이
웅변만으로 일국의 장군이 되고 정계의 거물로 등장했듯이.


혹자는 이러한 팬들의 움직임을 "오락질에 쓸데없이 심각하다"는 말로 비하하고 심지어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의미 없는 짓으로 매도하지만 한낱 PC방 폐인에 불과했던 이들을 브라운관으로 끌어내고 억대의 연봉을 받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던가. 이렇게 치기어린 꿈과 열정이 아니던가.

백번 양보해서 이지눈의 활동이 아무것도 바꾸어놓을 수 없다 해도 손가락만 빨면서 가만히 옳은 것을 옳다고도 하지
못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가만히 앉아 어떻게든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을 비웃는 것이 올바른 팬의 태도
라고는 누구도 이야기 할 수 없다.

과거 왕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전제군주국의 시대조차 왕위를 노리는 이는 천명이란 명분을 빙자하였고, 그 천명이란
민심의 동의를 의미했다. 하물며 21세기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이지눈의 열정과 대의에 다시한번
박수를 보낸다.











지금껏 "그들"은 우리의 말을 수도 없이 무시해 왔습니다. 혹자는 MSL 개편 반대가 무위로 돌아간 것을 예로 들며
이지눈의 행동을 깎아내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 바닥에 발을 담갔다는 관계자조차 그러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멀리멀리 돌아오기도 하고, 느리고 조악하지만 우리가 보고 즐기는 이 스타리그는
결국 팬들의 여론을 벗어나지 않는 형태로 굴러왔습니다. 미비했던 규정은 말썽이 많을 지언정 하나 하나 보완이
되어가고 있으며 프로리그에서 잠시나마 팀배틀 방식을 도입했던 것, 그리고 과거 중계권 파동을 무위로 돌린 것이
스덕후들의 열정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팬들의 여론의 힘입니다. 이지눈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여론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묶어주는 선도자의 역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지눈에게 어느 석학의 말을 바칩니다.


"미래는 현재의 무한한 연속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를 둘러싼 악조건과 싸우면서 인간으로서 옳다고 믿는 바 데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찬란한 승리인 것입니다."

-하워드 진.